제멋대로 자란  Overgrown 전시 리뷰

허나영

2015


우리는 상상을 한다. 이는 어쩌면 가장 인간다운 본성 중에 하나일 지 모른다. 그 상상은 먼 훗날 나의 미래일 수도 있고, 지금 당장 내딛는 발걸음을 통한 기대일 수도 있으며 과거에 대한 기억일 수도 있다. 이를 누군가 말한 상상계나, 초인에 대한 기대 혹은 시뮬라크르의 세계로, 아니면 좀더 쉽게 천국이나 지옥으로 설명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나 자신이 지금(NOW), 여기(HERE)에 존재한다는 사실 외에는 모든 것이 믿기 어려운 불안정한 현실 속에서, 작가 이채은은 현실(REALITY)이 투영된 환상적 이야기(FANTASTICAL NARRATIVE)를 ‘회화’로 나타내고 있다.

현실(REALITY)과 환상(FANTASY), 이 둘은 통념적으로는 매우 다른 개념이다. 그런데 상반된 방향을 가진 현실 세계(NORM)와 작가의 환상(FANTASY)과의 결합을 이채은은 ‘회화의 언어’로 엮어내고 있다. 회화의 특성은 평면성만이 아닌, 물감의 물성에 의해서도 규정된다. 캔버스의 천과 유화 물감이 만들어내는 결합과 분리는 회화 특유의 조형적 특성과 언어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를 위하여 유화만을 고집하고 그 중에서도 고운 린넨 천을 선호한다. 린넨 위에 물감이 한겹 한겹 쌓여, 그 밑 색이 화면 속으로 배어들기도 하며 또 색을 드러내기도 하면서 유화 물감 특유의 물성이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회화적 물성은 그저 물질 그 자체를 넘어서 이채은 만의 환상적인 공간을 만들어낸다. 수많은 레이어가 겹쳐지는 화면 속에서 우리는 뭔가 명확하게 이름 지을 수 없는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이는 오로지 감각으로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시각적 감각뿐만 아니라, 촉지적으로도 그림 속 공간의 열기를 느낄 수 있고 향기 마저 전해지는 듯 하다. 이처럼 작가의 회화를 바라보고 있으면 현실과 픽션의 공간을 넘나드는 유화 물성에 이끌려 화폭 속 다른 세계( TRANSENDENTAL PICTORIAL SPACE)의 공기를 우리의 폐에 담을 수 있을 것도 같다. 이러한 환상의 공간에 이채은은 우리에게 익숙한 사물들을 하나씩 놓는다. 그리고 그 익숙한 사물을 단서로 삼아, 작가가 만든 환상의 세계를 넘나들게 한다.

하지만 기괴한 숲에 무지개, 말, 올빼미 등과 같은 그림 속 사물들은 분명 우리 세계에 존재하지만 일상 생활에서 접하기는 힘든 것들이다. 어쩌면 판타지 영화나 소설에서 봤을 법한, 다시 말해 간접적으로 접했을 법한 비일상적인 사물들을 화면에 배치한다. 작가는 이를 통해 자신이 만든 환상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마치 앨리스를 이상한 나라에 이끈 하얀 토끼처럼 말이다. 이러한 형상들을 통해 작가는 관람객들이 자신이 만든 환상의 세계에 마음을 열고 들어와주길 바란다.

그저 몸과 마음을 맡기고 그림 속 올빼미들처럼 고개를 기울여 보기도 하고, 화면 곳곳에서 퐁퐁 솟아나는 무지개를 보며 어릴 적 꾸던 허무맹랑한 상상들을 떠올려 볼 수도 있다. 고운 린넨 천 위에 켜켜이 쌓인 유화 물감, 그리고 그 물감층을 통해 만들어진 환상의 세계, 그 낯선 공간에 우리를 이끄는 어디서 본듯한 사물들.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그림 앞에 선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가는 듯하다. 지금, 여기에 있는 당신도 자신의 하얀 토끼를 쫓아 몸과 마음의 빗장을 풀고 이채은이 만든 환상의 세계에 들어가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