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도 저기도 아닌 세계

정현

2018


이채은의 회화를 제대로 느끼려면 우선은 해석하지 않고 그림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관찰해 보는 게 좋다. 의미를 찾지 않고 그림 속 이미지들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이전 그림에서 본 동작, 인물, 도상 들을 찾아낼 수 있다. 이미지들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거나 특별한 상징성을 가졌는지를 모르더라도 말이다. 그의 회화엔 이미지가 넘친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2017)을 보면 영화 <오즈의 마법사>의 주인공 도로시가 화면 한쪽을 채우고 있고, 아래에서는 곡예를 하듯 몸을 비틀고 있는 사람들의 등장한다. 마른 갈대밭 끝 언덕 위에는 음산한 느낌의 백색 건물이 있고 그 주변에는 검정새떼가 휘몰아친다. 언뜻 히치콕의 영화 <>가 연상된다. 갈대밭 사이에는 연신 흐느적대는 풍선 간판이 세워져 있고 그 앞에는 주의 표지 고깔이 서 있다. 특정한 논리나 구조를 가지고 있는 화면은 아니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소설, 영화, 대중매체에서의 문구 등에서 우연히 어떤 영감을 받는다고 한다. 여기에서 영감이란 특별한 순간이라기보다는 자신의 기억·지식·정보와의 접점 정도로 볼 수 있겠다. 일상에서의 일부가 특정 회화 작품 속 이미지와 겹치고 영화 속 장면들이 연쇄적으로 뒤따르면서 인상과 기억, 현실과 허구가 뒤섞인다. 각각의 이미지, 의미가 있든 없든 그것들은 시각적 기호의 집합이라 부를 수 있다. 그래서 시각적 기호들을 분해하여 이채은의 회화 속 세계의 엉킨 실타래를 풀어보고자 한다. 이미지와 이야기를 연결시키기 위함이라기보다는 그의 회화 세계를 미시적으로 관찰함으로써 작품 하나가 아닌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이다.

알레고리

소설이든 영화든 회화든 내용에 참조물이 많으면 서사의 중심이 온갖 기호들로 다소 어지럽게 펼쳐지기 마련이다. 어떤 경우는 작가의 지식을 과시하기 위하여 참조물이 넘칠 수도 있고, 과거와 현재, 여기와 저기, 기억과 상상, 허상과 현실 사이를 연결하는 고리가 되어 주제와 사건이 맺는 복합성을 드러내는 수사학적 장치가 되기도 한다. <트위스터 I II III>시리즈(2017)는 삼면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 배경에는 세 점의 회화 작품이 사용되었다: 히에로니 보스의 <마술사>(1502), 고흐의 <까마귀가 있는 밀밭>(1890), 고바야시 키요치카의 <인천에서 일본해군의 위대한 승리>(1904). 삼면화 왼쪽 화면 중앙에 있는 마술사가 잔꾀를 부리는 장면, 중앙의 화면에서는 고흐 회화의 배경인 밀밭과 까마귀 떼를 발췌 확대하여 배경으로 사용하였고, 오른쪽 화면에는 기요치카의 우키요에 판화의 배경과 삼면화 형식을 차용하였다. 이처럼 이질적인 참조물들은 원문맥에서 벗어난 레디메이드와 다름없다. 이제부터 참조물은 과거가 아닌 현재를 위한 이미지다. 전 지구화에 의한 우경화, 국수화 되어가는 시대적 흐름은 연일 쏟아지는 뉴스와 이에 대한 양극화된 해석들은 합리성과 통계를 섬기는 동시대가 처한 현실의 허구성을 드러낸다.

그의 작업에 있어서 차용은 작품 내부에서 의미를 발생시키기도 하지만, 작품과 작품 사이에서 더욱 활발하게 의미작용을 일으킨다. 근작인 트위스터 게임 시리즈는 이중적 의미를 띠고 있다. 트위스터 게임은 보드게임으로 회전판을 돌려 화살표가 가리키는 색이 선택되면 게임 참가자들이 여러 색이 프린트 된 매트 위에서 양손양발을 모두 이용하여 자신에게 선택된 색을 터치하고 있어야 한다. 트위스터 게임 자체가 의미작용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연의 선택을 따라서 자신과 타인의 관계가 뒤엉키는 상황은 우스꽝스럽지만 한편으로 자율성이 없는 주체를 떠올리게 된다. 속고 속이는 마술사, 울고 웃기는 광대, 소용돌이에 휩쓸려 다른 차원의 세계로 이동한 도로시를 차용한 <트위스터 I II III> 시리즈는 단순히 유희적인 상황을 풍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작가의 우화적 세계관을 비스듬히 보여준다. 특히 히에로니무스 보쉬와 같은 북유럽르네상스 작가의 세계관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신화적 세계와는 거리가 먼 일상의 모습이었다. 보쉬의 마술사도 당시 네덜란드 장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기요치카는 러일전쟁의 한 장면으로 동아시아를 둘러싼 각축이 벌어질 당시 인천항의 모습이 판화로 기록했다. 이채은은 과거 회화의 장면을 발췌하여 모호한 시공간으로 불러온다. 배가 불타 침몰하는 장면, 우매한 대중을 속이는 모습, 희생자 또는 제물로 바쳐진 인물이 등장한다. 최근 한국사회가 겪은 부조리한 일련의 사건들을 떠올려보자. 이채은은 사건을 재현하는 대신 알레고리를 끌어들인다. 극적인 배경과 앞뒤가 맞지 않는 기표들을 혼합하여 현실의 부조리함을 풍자한다.

극적일 만큼 흥미로운 배경

흥미롭게도 화면에 감정을 불어넣는 건 다름 아닌 배경이다. 이채은은 배경에 상당히 공을 들이는 편이다. 때론 주제와 배경의 관계가 모호할 정도로. 때로는 차용된 이미지가 배경(풍경)의 존재감에 손해를 보는 게 아닌지 걱정될 정도로 말이다. <늑대의 그림자 속에서 제멋대로 자란 이야기>(2017)은 배경으로만 이뤄진 세계처럼 보인다. 온갖 색들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가상의 세계는 정글의 습함 속에서 한없이 자유로운 식물과 무지개 색채를 띤 공기로 채워져 있다.

<그곳>(2015)에서는 무지개빛 모자이크로 가득한 무인도보다도 더욱 공을 들인 구름과 바다(?)를 발견할 수 있다. 노을 진 하늘, 수면 위에 비친 그곳의 그림자는 색의 환희로 가득하다. 검은 구름의 습격(2015), 트위스터 I(2017)에서도 유사한 배경을 확인할 수 있다. 마치 배경에 관한 이미지를 모은 탬플릿에서 고른 장면처럼 이 ‘극적이고 흥미로운 세계’는 표현의 상투성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회화 요소는 이채은의 회화와 레디메이드 개념과의 관계를 되묻게 한다. 추측하건데 이처럼 양식적인 배경은 서로 다른 세계에서 불러들인 이미지 기호들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기 위한 작가의 배려이자 고전주의 회화 구조에서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 같다.

무지개와 고깔

그의 작업 어디에서나 무지개는 쉽게 발견된다. 트위스터 시리즈에서는 전에 비하여 무지개가 수줍게 등장하지만, 트위스터 게임을 하는 인물의 무지개 색 스웨터에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제멋대로 자란 무지개>(2015)에서는 마치 식물처럼 자라나는 무지개가 화면을 채우고 그 사이에 부엉이, 고양이(?)의 얼굴이 숨어 있다. 이채은의 세계에 초대된 도로시와 무지개, 동서양 고전회화와 알레고리, 우스꽝스러운 현실의 장면(트위스터 I II III시리즈) 등은 작가가 사회적 현실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위치, 크기가 결정된다. 무지개는 거짓과 진실, 허상과 실재 사이에 위치하는 시각적 기호다. 기대와 희망의 표상이지만 헛된 꿈이 되어버리기도 하는 무지개와 함께 최근 들어서는 주황색 고깔과 위험 표지판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작가가 한국에서 가장 자주 보는 오브제였다고 한다. 표지판들은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가리키는 지표인 셈이다.

그러나 위태로운 오브제가 보호와 안전이란 양가적 의미를 품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글을 쓸 때 저자의 속내를 드러내면 좋은 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속을 보이는 건 좋지 않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속 보이는 글은 사실 자기 속내를 감추는 글이다.” 이채은의 회화는 현재 자신이 무엇을 보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좋은 의미로 속내를 드러내는 회화라고 얘기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