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든 플롯/Hidden Plot 전시 리뷰

조숙현 

2019년1월


전시장은 암흑이다. 그나마 낮에는 창문 사이로 희미하게 바깥 빛이 새어 들어오지만, 저녁에는 완전한 어둠이다. 그런 와중에 하이라이트 조명들이 조용히 깜박댄다. 이채은 작가의 개인전 <히든 플롯>이 열리고 있는 전시장의 풍경이다. 

이채은 작가의 회화는 ‘꽉 찬 회화’, ‘지독한 그리기’, ‘노동집약적 회화’ 등으로 수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작가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안에는 다양한 콘텐츠와 알레고리가 포함되어 있다. 이 작품은 세 점의 회화가 가로의 한 점으로 이어져 있는 삼연작화다. 왼쪽의 회화에서 푸른 에이프런을 걸치고 붉은 구두를 신고 있는 소녀는 <오즈의 마법사>에 등장하는 도로시이다. 작가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설득력 있게 전달하기 위해 스토리텔러(story teller)라는 캐릭터(장치)를 동원한 ‘스토리텔링(story telling)’ 기법을 차용했다. 스토리텔링 기법은 문학과 영화 등 전통적으로 서사(story)를 골조로 하는 장르에 주로 사용되지만, 일부 회화 작품에까지도 적용될 수 있다. 스토리텔러는 관람자가 가장 공감할 수 있고 서사를 이끌어 낼 수 있는 힘이 있는 존재가 지정되는데, 도로시는 이 작품에서 스토리텔러를 담당하는 캐릭터이자 작가의 자아가 어느 정도 투영되어 있는 캐릭터이다. <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는 자신의 강아지 ‘토토’를 찾아 마법사와 마녀들의 세계를 유랑하는 캐릭터였다. 안에서 도로시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더듬고 다니는 세계는 악몽과 마법이 섞여 있는 세상이다. 

또한 작가의 작품은 동서양의 고전을 두루 차용하고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요소는 네덜란드 중세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쉬(Hieronymus Bosch; 1450 년경 ~1516)이다. ‘지옥과 악몽을 그린 화가’ 보쉬는 1500 년대 네덜란드에서 가장 중요한 그림을 그린 종교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가 그려낸 초현실적이고 어두운 세계에서는 기인과 성인, 악마와 천사, 괴수와 귀족이 공존하고 있다.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세속적 쾌락의 동산>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데, 지옥도의 모습이 대단히 독창적인 구조와 캐릭터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런가하면 그림의 배경에 등장하는 파도와 선원들은 일본 고전 판화 우끼요에의 콘텐츠를 따왔다. 

작가의 작품은 영화적인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작가의 전시 제목으로 사용한 ‘플롯(plot)’은 영화용어인데, 서사가 있는 소설과 영화에서 인물, 주제, 배경과 함께 허구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이다. 플롯은 스토리의 전 단계로, 플롯들이 모여 스토리를 구성한다. 이채은 작가의 작품은 여러 플롯들이 모여 보쉬의 악몽과 도로시의 마법 세계를 구성하는 디제시스(diegesis: 영화용어로,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이야기의 외연적 요소에 의해 구성되는 허구의 시공간)의 총체이다. 

이처럼 이채은 작가의 작업은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과 영화적 기법, 서양적인 것(보쉬)과 동양적인 것(우키요에), 전통과 현대 등의 이야기가 한 데 엉켜 있는 ‘꽉 찬 이채은 회화’이다. 이런 ‘지독한 그리기’, ‘집요한 그리기’ 회화 기법을 장르로 치부할 수는 없지만, 어떤 계보를 이루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해외의 척 클로스를 비롯해 국내에는 김동유, 홍경택, 황현승, 유근택, 공성훈, 정재호, 이샛별, 써니킴 등의 작가가 있다. 박영택 평론가 등은 이런 현상의 뿌리를 1980 년대 민중미술에서 찾기도 하고, 보다 젊은 작가들의 경향에는 ‘88 만원 세대의 불안이 투영된 회화’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그런데 작가의 전시 <히든 플롯>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요소는 영화적인 기법이나 동서양 고전의 그림자, 혹은 지독하고 집요한 그리기의 총체가 아니라, 바로 일부만을 조망한 전시 방식이다. 앞서 열거한 작가의 그림 콘텐츠를 전시장에서 민낯으로 볼 수가 없다. 작가는 전시장을 모두 암막처리하고 작품의 일부만을 하이라이트 조명으로 간헐적으로 비추는 방식을 선택하였다. 

“우리가 굳게 믿고 있는 진실은 거짓일 수도 있지 않을까. <히든 플롯>은 과잉 정보와 이미지의 홍수 속에 살면서 범하게 되는 인식의 오류를 보여주고자 전시실 내부를 암실로 꾸몄다. 여러 회전각으로 돌아가는 핀조명은 작품의 부분만을 동시다발적으로 비추도록 설정되어 있다. 이는 부분의 피상적 조합만으로는 전체를 온전히 이해할 수밖에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 같은 작가노트는 현대사회의 과잉 정보와 역설적으로 가벼운 이해 논리를 강조한 전시 기획의도를 나타낸다. 그런데 정작 기획자와 평론가로서 놀라운 부분은 따로 있다. 작가가 기획 의도를 나타내기 위해 자신의 작품을 희생하기로 결정한 전략이다. 예전에 작가가 자신의 회화를 받아들이는 관객들의 반응에 대해 고민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 속에 있는 촘촘한 콘텐츠를 받아들이는 관객들의 ‘장님 코끼리 만지기’ 격의 반응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작품을 잘 설파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것도 작가의 몫이다. 이 때 암실 속에서 작품의 부분만을 노출한 작가의 선택은 꽤나 대담하면서도 영민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작가라면 누구나 신작을 자랑하고 싶은 욕망이 있을텐데, 신작은 아예 암막 구석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얌전히 놓여 있다.(!) 작가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짝짝짝.